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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태종 평전
  • 태종 평전
  • 저 자 :박현모
  • 발행자 :흐름출판
  • 등록일 :2022.06.15
  • 보유 권수 :3권
  • 공급사 :북큐브
  • 대 출 :0/3권
  • 예약자수 :0명
  • 소속도서관 :통합
  • 추천수 :0
  • 대출 여부 :가능
  • 유형 :epub
  • 지원기기 : PC 태블릿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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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소개

조선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강명한 군주,
태종 이방원의 진면목을 담은 단 한 권의 책!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나의 나라〉…, 이 드라마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조선 제3대 국왕인 태종이 주인공 혹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사극들이다. 태종 이방원만큼 드라마나 소설 등에 자주 소환되는 왕도 드물다. 이들 매체에서 태종 이방원은 위화도회군, 최영·정몽주 같은 고려 충신들의 죽음에서부터 조선 개국, 정도전 숙청, 제1·2차 왕자의 난에 이르기까지 여말선초 격동하는 역성혁명의 한복판에서 그 누구보다 비정하고 차가운 칼날을 휘둘렀던 인물로 그려진다. 잔인무도한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가운데, 정작 정치가로서 그가 추구했던 가치와 ‘피의 숙청’을 통해서라도 왕권 강화를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온전히 알려지지 못했다.
이 책 《태종 평전》은 정조와 세종 등 조선의 부흥을 이끈 국왕들의 리더십을 비롯해 정도전과 최명길 등명재상들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이 2010년부터 최근까지 약 10여 년 이상 《태종실록》을 연구하며 태종의 국가 경영 리더십을 면밀하고 입체적으로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 건국 후 창업기를 거쳐 수성기로 진입하는 역사의 전환기에 그 중심에 있었던 태종의 언행들을 실록을 비롯해 다양한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되살려내는 데 초점을 두었다. 태종은 여러 지점에서 탁월성을 보인 인물이었지만, 무엇보다 ‘위기 경영’에 매우 능했다. 특히 왕위에 오르기 전, 1388년 5월 위화도회군 때부터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까지의 12년간은 그의 정치적 생명이 백척간두에 매달린 듯 위태로운 시기였는데, 그때마다 태종은 늘 ‘선발제지(先發制之, 먼저 나서 사태를 진압한다)’의 방식으로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한 문제의 싹을 제거해버리며 사태를 유리한 방향으로 반전시켰다.

“이상적인 군주란 온갖 도전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굳센 의지와 함께 일의 이치를 꿰뚫는 눈을 가진 존재다. 이 군주상에 걸맞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사람을 말할 수 있겠다. 바로 조선의 제3대 국왕인 태종 이방원이다. 500년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아낸 정치 비전과 국가 기강 정립, 그리고 무엇보다 인재 경영 측면에서 태종을 따라갈 지도자가 없다.”
_ 〈여는 글〉 중에서


창업과 수성을 두루 이룬 위대한 군주, 태종
그가 추구했던 위대한 국가를 만드는 길!

《태종 평전》은 총 7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정치가 태종’)에서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역사를 조명한다. 위화도회군으로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후부터 1400년 즉위하기까지 태종은 총 다섯 번의 위기를 맞이한다. 회군(回軍)과 건국(建國)과 즉위(卽位)라는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동안 그가 보여줬던 도전과 응전의 장면들은 이후 태종이 왕좌에서 보여준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서막이다.
제2장(‘왕의 여자들과 인간 이방원’)과 제3장(‘태종 재상 3인방’ 이야기)에서는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한 명인 부인 원경왕후 민씨를 비롯해 태종 재위 시절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며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만들어나간 명재상 조준, 하륜, 권근 등 ‘태종의 사람들’을 다룬다. 왕권과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외척과 공신은 과감히 숙청하되, 정치적 비전이 일치하고 능력이 출중했던 이들은 품 안으로 거둬들여 끝까지 책임졌던 모습에서 ‘가(家)’보다 ‘국가(國家)’를 우선시했던 태종의 절대적 국가관과 인재 등용의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
제4장(‘태종의 나라, 조선’)과 제5장(‘실용 외교와 국방’)에서는 권력 쟁탈이라는 정치사 위주의 서술 속에 가려졌던 태종식 국가 경영의 실제를 국내외로 나눠 묘파한다. 태종은 온 백성이 ‘가족같이 화합하고 잘 사는 나라’, 즉 ‘소강(小康)의 나라’를 정치 비전으로 제시하고, 국가 통속력을 높이기 위한 각종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신문고 운영, 전국의 토지 전수 조사, 오늘날의 주민등록증제에 해당하는 호패법 도입과 실행, 불교 개혁, 노비종부법 시행 등 태종 재위 시절에는 민생 안정과 국가 기강 정립을 목표로 각 분야에서 다양한 입법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사대교린의 원칙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실용 외교로 혼란한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에서 국경에서의 소요를 진압하고 국익을 지켜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를 둘러싼 일본의 도발이 계속되는 요즘, 우리나라 영토 이슈와 관련해 《태종실록》에 담긴 기록들은 이들 지역을 우리 영토로 지켜내게 하는 중요한 역사적 근거로 작용한다(《태종실록》은 ‘백두산’과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기록이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이다). 태종 재위 시절 조선왕조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창고를 증설해야 할 정도로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고, 외척 세력 제거로 왕실이 안정되었으며, 명나라와 단단한 신뢰를 구축한 상황이었다. 태종의 이런 치적들은 국내외적 정치 안정이 성공적 개혁 달성의 조건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태종이 일군 일련의 성과들 중 그의 일생 최대의 업적을 꼽으라면 그것은 단연 성공적인 왕위 승계 작업이다. 만일 태종이 충녕대군을 포함해 왕자들을 보호하지 않았거나, 마지막에 과감히 세자 교체를 단행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세종 치세’는 불가능했으리라. 제6장(‘성공적인 전위, 리더십의 대단원)에서는 태종이 왕위를 승계하는 과정을 면밀히 살피면서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권력의 화신이라는 세간의 오해를 불식시킨다. 그가 정치를 시작한 이래 취했던 일련의 조치들, 예컨대 정적의 척살, 내외척 제거와 같은 행동들은 많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충분하다\[已?·이족]’라면서 권좌에서 스스럼없이 물러남으로써 태종은 자신이 권력 중독자가 아님을 증명한다.


“뛰어난 지도자가 나오면 온 나라가 복 받는다.”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강명한 지도자에 대한 염원
우리가 지금 태종 리더십을 다시 돌아봐야 하는 이유

나라를 부강하게 이끌 큰 틀의 아젠다를 제시했던 정치 거목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치에 대한 경멸과 조롱이 채우고 있는 듯한 요즘,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정치적 비전과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리더의 존재가 절실하다. 태종이 서거한 지 600년이 되는 해이자 국가의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선거를 목전에 앞둔 지금, 우리가 태종 리더십을 다시 되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물론 창업과 수성을 두루 이룬 위대한 군주였던 태종에게도 한계는 존재한다(제7장 ‘태종 정치의 빛과 그늘’).
왕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일이 원활하게 돌아가게 만드는 추진력은 있었으나(‘강거목장’의 리더십), 국왕의 생각을 뛰어넘는 창의력 있는 인재의 출현은 일정 부분 가로막았다. 세종의 위대함은 부왕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부왕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이다. 무엇보다 세종 재위 기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척살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이는 정치에 대한 당대 대소신료와 신민들의 신뢰를 회복시켰다.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세종시대 인재들은 저마다의 능력을 자유로이 꽃피웠고 이는 태종에서 시작해 세종으로 이어지는 50여 년(1400~1450년)이 ‘한국 문명의 위대한 축(pivot)’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태종 평전》은 부록들의 구성도 알차고 옹골지다. 책의 말미에는 《태종실록》에 기록된 태종의 언행 중 그의 정치적 비전과 삶의 지향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주는 구절 7개를 추려내어 담았다(‘태종 어록 7선’). 말은 사람의 성품과 기질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이다. ‘태종의 말’ 속에서 백성의 삶을 위해 그가 걸머졌던 책임감과 신중함, 인사(人事)를 만사로 보았던 인재 중시의 철학, 비합리적 관행을 타파하고자 했던 유연한 사고, 적절한 시점에 과감히 권좌에서 물러날 줄 알았던 자기 절제력 등을 두루 엿볼 수 있다.
지금까지 발표된 태종 관련 학술 논문 현황을 한데 모은 부록도 눈여겨봄직하다. 대중매체에서는 굉장히 자주 다루어지는 역사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논문이 발표된 이후(1962년)부터 지금까지 약 60년간 태종을 주제로 삼은 학술 논문은 채 100편이 되지 않는다(2021년 기준, 총 83편). 또한 기왕의 연구들도 특정 분야에 치우쳐져 있어 태종시대에 이룩한 경제·국방·국가 기간(基幹) 정립에 대한 조명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저자에 따르면 《태종실록》에 실린 풍부하고 다양한 국가 경영 사례는 앞으로 더 다각적으로 연구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보기 좋게 갈무리해둔 ‘태종 연구 논저’ 리스트는 후속 연구자들은 물론이고, 태종을 더 깊이 독해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귀중한 자료로 기능할 것이다.

목차

태종이 가(家)와 국가를 구분한 것은 국가를 절대적 존재로 여긴 그의 생각을 보여준다. 가정 안에서의 문제, 즉 형제간의 불목(不睦)은 상대적인 잘못이지만,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행동\[不忠·불충]은 용서가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말은 똑같은 행동이라도 일가(一家) 차원에서는 용서할 수 있지만 국가의 차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숭고하고 독자적인 실체다. 따라서 국가를 위해서라면 때로 군주는 공신과 친지, 가족까지 숙청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국왕 자신의 몸까지 바칠 수 있는 신성한 존재가 곧 국가라는 게 태종의 국가관이었다. (64쪽)

왕위에 오르기까지 태종이 보여준 진전(進展)과 반전(反轉)의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의문은 ‘왜 이방원이었을까’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기까지 우리 역사에는 빼어난 인재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이성계만 해도 적자와 서자를 포함해 아들을 여덟 명이나 두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왜 이방원이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1388년부터 1400년까지 12년간의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방원은 다섯 번의 큰 위기를 만났다. 1388년 5월 위화도회군 때부터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방간의 난)’까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이방원은 노련한 외과 의사처럼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사태를 반전시켰다. (95쪽)

태종이 ‘가족 같은 국가’를 언급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실현 가능성 때문이었다. ‘대동 정치’가 구현된 요순시대는 이상적이지만, 조선의 현실에서 도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공자가 꿈꿨던 ‘삼대 시절의 융성함’을 차선의 목표로 설정했다. 요컨대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집안으로 보고, 백성들을 같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들로, 왕 자신을 부모로 여겼다. 자식들 사이에 좀 더 힘센 아이와 약한 아이, 똑똑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같은 탯줄에서 나온 형제자매로, 차별 없이 더불어 잘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160쪽)

이처럼 태종은 신하들의 지배적인 의견인 ‘개경 고수론’을 물리치고 부왕 뜻을 받들어 한양 환도를 적극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앞의 조준 이야기에서 살핀 것처럼, 태종의 환도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고, 이후로 한양은 흔들림 없는 조선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대표 궁궐로 그 위상을 정립했고, 종로의 좌우 시전 상가가 볼 만하게 들어서서 “국가 모양이 갖춰졌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170쪽)

태종은 태조와 함께 창업 군주로 불린다. 창업은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쇠퇴(衰退)’라는 동양 사상의 체계순환론에서 첫 번째에 위치한다. 토대 정립기(founding period)인 창업기에 태조와 태종이 한 일은 국가 이념과 체제를 정립하고, 도읍지를 선정하는가 하면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이 중에서 태종은 조선을 수성(consolidation)의 시기로 전환시키는 책무까지 걸머졌다. 국가의 토대 정립과 각종 개혁 조치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때가 곧 태종시대였다. 집을 설계하고 짓는 일(창업)과, 집에 들어와 살면서 불편함을 고치는 작업(수성)을 함께 해야 했다. (172쪽)

태종은 국가 통속력을 높이기 위해 토지와 백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여러 가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국가 통속력 측면에서 볼 때 두 시기 개혁이 주목된다. 제1차 개혁은 태종 재위 4~7년(1404~1407년)에 추진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태종은 신문고를 도입하였고(1402년 1월), 새로운 화폐인 저화(楮貨)를 사용하게 했다(1401년 4월). 전국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1405년)과 사찰 소속 땅과 노비 다수를 관청 소속으로 만드는 불교 개혁, 그리고 공무원 승진시험인 중시 도입도 이 시기에 이뤄진 일이었다(1407년). 이 시기에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전에 ‘조사의 난’이 진압되고(1402년 2월) 공신 이거이가 숙청되는(1404년 10월) 등 국내위협 세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락제의 태종 즉위 승인(1403년 4월), 장남 이제의 세자 책봉(1404년 8월), 15개월이나 걸린 한양 재천도 마무리(1404년 7월~1405년 10월) 등으로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든 점도 개혁 입법을 가능케 한 배경이었다. (180쪽)

태종 개혁 중에서 민심을 얻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민생 경영, 즉 백성 생활과 생계에 직결되는 사안을 잘 처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20년 동안 백성들은 평화로웠고, 물산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찼다”라고 평가했다(《세종실록》, 4년 5월 10일). 태종은 어떻게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을까? 실록을 보면 그의 재위 기간에 사방 국경이 안전하여\[四境按堵·사경안도]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살았다\[民安·민안]고 한다. 물산이 풍부하고\[物阜·물부] 창고가 가득 찬 것은\[倉庫充溢·창고충일]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일터에서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였다. (197쪽)

태종정부가 명나라 외교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양국 간 신뢰 구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끼리의 교유와 존중은 국가 간 신뢰의 기초가 된다. 그 점에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명나라 수도를 방문해 주원장 등과 교유한 점은 매우 중요했다. 조선 군주 중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태종을 꼽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태종의 외교 방식은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일으켜 사태를 제압한다’는 뜻의 이 말은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면서 태종이 쓴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탁월한 정보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끌어나가는 데 귀재였다. (221쪽)

태종은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군주처럼 과감하면서도 재빠르게 일을 추진했다. 정적을 제거할 때나, 사병 혁파처럼 난관에 직면했을 때, 그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돌파력을 발휘했다. 호랑이의 외침\[咆哮·포효]처럼, 반대자를 제압하는 ‘이론적 무기’를 능숙하게 휘두를 줄도 알았다.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하는 ‘한양 재천도’나 국왕 재량권을 키우기 위한 관료제 개혁(육조직계제 등)을 추진할 때 그는 고전과 역사 사례를 인용해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는 호랑이를 몰 듯 나라를 이끌어간 군주였다. (294쪽)

변계량에 따르면, 이 모든 태종의 업적도 그의 마지막 치적, 즉 “혼매한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백성의 임금으로 삼은 일”이 없었더라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이방원은 새로 왕위에 오른 세종이 국사를 합당하게 잘 처결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본디 주상이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노성(老成)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했다”라며 만족해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53번째 생일잔치에서 “나처럼 사람을 잘 얻어 나라를 맡긴 이는 고금 천하에 오직 나한 사람뿐”이라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태종이 자신이 겪은 수많은 인물 이야기와 정치적 결정, 추진력의 중요성을 청년 군주 세종에게 세세하게 들려주는 실록의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역사상 가장 짧은 세자 교육 기간(66일)과 당시까지만 해도 책벌레에 불과하여 정치권력의 냉혹함이나 국가 경영의 복잡 미묘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세종이, 향후 그처럼 노련하게 정치 세계를 헤치고 나갈 수 있었던 비밀이 기록되어 있다. (294~295쪽)

저자 소개

태종이 가(家)와 국가를 구분한 것은 국가를 절대적 존재로 여긴 그의 생각을 보여준다. 가정 안에서의 문제, 즉 형제간의 불목(不睦)은 상대적인 잘못이지만, 국가 질서를 위협하는 행동\[不忠·불충]은 용서가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말은 똑같은 행동이라도 일가(一家) 차원에서는 용서할 수 있지만 국가의 차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죄가 된다는 뜻이다. 국가는 그 자체로 숭고하고 독자적인 실체다. 따라서 국가를 위해서라면 때로 군주는 공신과 친지, 가족까지 숙청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국왕 자신의 몸까지 바칠 수 있는 신성한 존재가 곧 국가라는 게 태종의 국가관이었다. (64쪽)

왕위에 오르기까지 태종이 보여준 진전(進展)과 반전(反轉)의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의문은 ‘왜 이방원이었을까’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건국기까지 우리 역사에는 빼어난 인재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이성계만 해도 적자와 서자를 포함해 아들을 여덟 명이나 두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왜 이방원이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1388년부터 1400년까지 12년간의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방원은 다섯 번의 큰 위기를 만났다. 1388년 5월 위화도회군 때부터 1400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방간의 난)’까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이방원은 노련한 외과 의사처럼 위험 요소를 제거하여 사태를 반전시켰다. (95쪽)

태종이 ‘가족 같은 국가’를 언급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실현 가능성 때문이었다. ‘대동 정치’가 구현된 요순시대는 이상적이지만, 조선의 현실에서 도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공자가 꿈꿨던 ‘삼대 시절의 융성함’을 차선의 목표로 설정했다. 요컨대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 전체를 하나의 집안으로 보고, 백성들을 같은 부모에게서 난 자식들로, 왕 자신을 부모로 여겼다. 자식들 사이에 좀 더 힘센 아이와 약한 아이, 똑똑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가 있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같은 탯줄에서 나온 형제자매로, 차별 없이 더불어 잘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160쪽)

이처럼 태종은 신하들의 지배적인 의견인 ‘개경 고수론’을 물리치고 부왕 뜻을 받들어 한양 환도를 적극 추진했다. 결과적으로 앞의 조준 이야기에서 살핀 것처럼, 태종의 환도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고, 이후로 한양은 흔들림 없는 조선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경복궁과 창덕궁이 대표 궁궐로 그 위상을 정립했고, 종로의 좌우 시전 상가가 볼 만하게 들어서서 “국가 모양이 갖춰졌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170쪽)

태종은 태조와 함께 창업 군주로 불린다. 창업은 ‘창업(創業)-수성(守成)-경장(更張)-쇠퇴(衰退)’라는 동양 사상의 체계순환론에서 첫 번째에 위치한다. 토대 정립기(founding period)인 창업기에 태조와 태종이 한 일은 국가 이념과 체제를 정립하고, 도읍지를 선정하는가 하면 도시 기반 시설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이 중에서 태종은 조선을 수성(consolidation)의 시기로 전환시키는 책무까지 걸머졌다. 국가의 토대 정립과 각종 개혁 조치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때가 곧 태종시대였다. 집을 설계하고 짓는 일(창업)과, 집에 들어와 살면서 불편함을 고치는 작업(수성)을 함께 해야 했다. (172쪽)

태종은 국가 통속력을 높이기 위해 토지와 백성을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여러 가지 개혁 입법을 추진했다. 국가 통속력 측면에서 볼 때 두 시기 개혁이 주목된다. 제1차 개혁은 태종 재위 4~7년(1404~1407년)에 추진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해 태종은 신문고를 도입하였고(1402년 1월), 새로운 화폐인 저화(楮貨)를 사용하게 했다(1401년 4월). 전국 토지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1405년)과 사찰 소속 땅과 노비 다수를 관청 소속으로 만드는 불교 개혁, 그리고 공무원 승진시험인 중시 도입도 이 시기에 이뤄진 일이었다(1407년). 이 시기에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전에 ‘조사의 난’이 진압되고(1402년 2월) 공신 이거이가 숙청되는(1404년 10월) 등 국내위협 세력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명나라 영락제의 태종 즉위 승인(1403년 4월), 장남 이제의 세자 책봉(1404년 8월), 15개월이나 걸린 한양 재천도 마무리(1404년 7월~1405년 10월) 등으로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든 점도 개혁 입법을 가능케 한 배경이었다. (180쪽)

태종 개혁 중에서 민심을 얻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일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민생 경영, 즉 백성 생활과 생계에 직결되는 사안을 잘 처리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20년 동안 백성들은 평화로웠고, 물산이 풍부하여 창고가 가득 찼다”라고 평가했다(《세종실록》, 4년 5월 10일). 태종은 어떻게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을까? 실록을 보면 그의 재위 기간에 사방 국경이 안전하여\[四境按堵·사경안도]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살았다\[民安·민안]고 한다. 물산이 풍부하고\[物阜·물부] 창고가 가득 찬 것은\[倉庫充溢·창고충일] 백성들이 전쟁 걱정 없이 일터에서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였다. (197쪽)

태종정부가 명나라 외교에서 가장 중시한 것은 양국 간 신뢰 구축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끼리의 교유와 존중은 국가 간 신뢰의 기초가 된다. 그 점에서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명나라 수도를 방문해 주원장 등과 교유한 점은 매우 중요했다. 조선 군주 중에서 외교를 가장 잘한 사람으로 태종을 꼽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태종의 외교 방식은 한마디로 “선발제지(先發制之)”라는 말로 집약할 수 있다. ‘먼저 일으켜 사태를 제압한다’는 뜻의 이 말은 정도전을 제거할 때를 회상하면서 태종이 쓴 표현이다. 실제로 그는 탁월한 정보력으로 사태를 파악한 다음, 상황을 유리한 쪽으로 끌어나가는 데 귀재였다. (221쪽)

태종은 마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군주처럼 과감하면서도 재빠르게 일을 추진했다. 정적을 제거할 때나, 사병 혁파처럼 난관에 직면했을 때, 그는 기호지세(騎虎之勢)의 돌파력을 발휘했다. 호랑이의 외침\[咆哮·포효]처럼, 반대자를 제압하는 ‘이론적 무기’를 능숙하게 휘두를 줄도 알았다. 대다수 신하들이 반대하는 ‘한양 재천도’나 국왕 재량권을 키우기 위한 관료제 개혁(육조직계제 등)을 추진할 때 그는 고전과 역사 사례를 인용해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마디로 그는 호랑이를 몰 듯 나라를 이끌어간 군주였다. (294쪽)

변계량에 따르면, 이 모든 태종의 업적도 그의 마지막 치적, 즉 “혼매한 이를 폐하고 덕 있는 이를 백성의 임금으로 삼은 일”이 없었더라면 수포로 돌아갈 뻔했다. 이방원은 새로 왕위에 오른 세종이 국사를 합당하게 잘 처결한다는 보고를 듣고는 “본디 주상이 현명한 줄은 알았지만, 노성(老成)함이 여기까지 이른 줄은 알지 못했다”라며 만족해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53번째 생일잔치에서 “나처럼 사람을 잘 얻어 나라를 맡긴 이는 고금 천하에 오직 나한 사람뿐”이라며 행복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태종이 자신이 겪은 수많은 인물 이야기와 정치적 결정, 추진력의 중요성을 청년 군주 세종에게 세세하게 들려주는 실록의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역사상 가장 짧은 세자 교육 기간(66일)과 당시까지만 해도 책벌레에 불과하여 정치권력의 냉혹함이나 국가 경영의 복잡 미묘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세종이, 향후 그처럼 노련하게 정치 세계를 헤치고 나갈 수 있었던 비밀이 기록되어 있다. (294~295쪽)